지식이 많아지면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실을 알고 난 사람은 그 사실을 몰랐던 자신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라고 합니다. 아이에게 공부를 설명하면서 경험했던 답답함을 출발점으로 지식의 저주가 단순한 의사소통 문제가 아니라 정보 비대칭과 관점 수용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인지편향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익숙한 정보가 실제보다 쉽다고 느껴지는 과정과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 지식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제가 바꾸게 된 설명 방법까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아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제가 ‘모르는 상태’를 잊은 것은 아닐까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모가 잠시 선생님 역할을 해야 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저도 아이가 공부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문제를 함께 보면서 설명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내용을 몇 번 설명했는데도 아이가 계속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를 읽자마자 무엇을 묻는지 보였고, 어떤 개념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금방 떠올랐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만 연결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답답해졌습니다.
“여기까지 설명했는데 이걸 왜 이해하지 못하지?”
처음에는 아이가 집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문제를 설명하면서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아이와 같은 문제를 보고 있었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출발점부터 달랐습니다.
저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문장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고, 어떤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풀이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 아이는 문제를 읽는 순간부터 중요한 정보와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구별해야 했습니다. 어떤 개념을 떠올려야 하는지, 그것을 왜 적용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찾아야 했습니다.
같은 종이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상 서로 다른 문제를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경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이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입니다.
Camerer, Loewenstein, Weber가 1989년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정보가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이 가진 정보를 무시하고 정보가 적은 사람의 판단을 재현하는 데 체계적인 어려움을 보이는 현상을 다뤘습니다. 연구의 중요한 의미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필요할 때 그 정보를 간단히 머릿속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가정이 실제 인간의 판단에서는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지식의 저주를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지식의 저주를 ‘전문가가 초보자에게 어렵게 설명하는 현상’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설명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보다 앞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상대방의 상태를 추정하는 기준에 개입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번 정답을 본 뒤에는 정답을 보기 전의 문제로 완전히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추리소설의 범인을 알고 다시 읽으면 처음에는 지나쳤던 문장이 결정적인 단서처럼 보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범인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평범한 문장이지만 범인을 아는 사람에게는 명백한 복선입니다.
부모와 아이의 공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너무나 당연한 연결이 아이에게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부모는 그 연결을 자신도 모르게 설명에서 생략합니다. 그러면서 아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의 저주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 자체가 아니라 이미 습득한 정보가 타인의 ‘정보가 없는 상태’를 추론하는 과정에 개입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문제는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만 주어진 정보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데 있습니다.
2. 지식은 왜 상대방의 관점을 가리는가? 정보 비대칭과 ‘익숙함의 착각’
지식의 저주가 흥미로운 이유는 교육 경험이 부족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Birch와 Bloom은 2007년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서 성인 역시 자신이 알고 있는 사건의 결과 때문에 다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거나 믿고 있을지를 판단할 때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타인의 지식을 분리하는 일이 성인에게도 언제나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모와 아이 사이의 사전지식(Prior Knowledge) 차이가 더해집니다.
부모에게는 오랜 시간 쌓인 지식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면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과 빠르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는
‘문제의 조건 확인 → 관련 개념 회상 → 공식 선택 → 계산’
이라는 과정이 하나의 연결된 흐름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다릅니다.
‘어떤 문장이 조건이지?’
‘이 조건이 왜 중요하지?’
‘전에 배운 것 중 무엇과 관계가 있지?’
‘여러 방법 중 왜 이 방법을 사용해야 하지?’
각각이 별도의 판단입니다.
숙련된 사람에게는 여러 단계가 하나로 압축되어 보이지만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여러 개의 단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을 발견했습니다.
잘 안다는 것과 잘 설명한다는 것은 같은 능력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 익숙해질수록 처음 배울 때 어려웠던 지점은 오히려 기억에서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설명하는 사람에게는 세 단계가 하나처럼 보이지만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세 단계입니다.
그리고 지식의 저주에 관한 후속 연구를 살펴보면 또 하나 흥미로운 메커니즘이 등장합니다.
2017년 Birch와 동료들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지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을지를 판단할 때 나타나는 편향을 연구했습니다. 연구자들은 그 원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억제(inhibition)와 유창성 오귀인(fluency misattribution)이라는 메커니즘을 다뤘습니다. 특히 실험에서는 정보가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주관적인 느낌, 즉 ‘유창성’을 그 정보가 다른 사람에게도 쉽거나 흔할 것이라는 신호처럼 잘못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지식의 저주와 유사한 편향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부분을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내가 어떤 문제의 답을 너무 쉽게 떠올렸다고 해서 그 문제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나에게 익숙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나에게 쉽게 떠오른다’와 ‘누구에게나 쉽다’를 혼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왜 어려워?”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생략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 번 해봤다.’
‘나는 관련 개념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
‘나는 이 문제와 비슷한 문제를 경험했다.’
이 조건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아이가 마주한 문제의 난이도는 부모가 느끼는 난이도와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의 저주를 단순히 제거해야 할 나쁜 인지적 결함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새로운 정보를 배우면 그것을 기존 지식과 연결하고 자신의 판단 체계 안으로 흡수합니다. 매번 문제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번 자신의 지식 체계에 들어온 정보를 필요할 때 다시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지식의 저주를 효율적으로 지식을 축적하는 인간의 인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대가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배울수록 세상을 이해하는 연결고리는 많아지지만, 동시에 그 연결고리가 아직 없는 사람의 위치를 재구성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이해했어?” 대신 “어디에서 길을 잃었어?”라고 묻게 된 이유
지식의 저주를 알아본 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아이에게 더 쉽게 설명해야겠다.’
하지만 이것 역시 충분한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표현만 쉽게 바꾼다면, 정작 필요한 연결고리는 여전히 설명에서 빠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꾸려고 한 것은 설명의 난이도보다 질문의 순서였습니다.
예전에는 설명을 끝내고 “이해했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응”이라고 대답해도 무엇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이 자신도 어느 부분을 정확히 모르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설명하기 전에 먼저 물어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처음 보고 무슨 생각을 했어?”
“어디까지는 알겠어?”
“어느 부분부터 모르겠어?”
이렇게 질문하면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아이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공식을 설명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공식보다 훨씬 앞 단계인 문제의 문장 자체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던 식입니다.
두 번째로 바꾼 것은 돼 말하기(Teach-back)입니다.
제가 설명하고 “이해했어?”라고 확인하는 대신 아이가 자신의 언어로 다시 설명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네가 나한테 설명해 볼래?”
이렇게 하면 단순히 고개를 끄덕일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이해의 빈틈이 드러납니다.
세 번째는 오답보다 오답에 도착한 경로를 보는 것입니다.
틀린 답을 보면 부모는 빨리 올바른 풀이를 알려주고 싶어 집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풀려고 했어?”라고 먼저 물으면 아이가 어느 지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산 실수와 개념의 오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문제의 조건을 놓친 것과 공식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다른 문제입니다.
원인을 확인하지 않고 정답만 다시 설명하면 같은 오류가 반복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설명의 공백’을 찾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잘 아는 부분일수록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부분이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정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이해하지 못할 때 제가 스스로에게 던지려고 하는 질문도 달라졌습니다.
“아이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보다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설명하는 사람의 머릿속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물론 모든 이해의 실패를 지식의 저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집중력이나 동기, 기초지식의 차이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 원인을 곧바로 능력이나 태도에서 찾기 전에 설명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정보 비대칭부터 확인해 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지식이 쌓이는 것을 대부분 긍정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많이 알면 판단도 좋아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저주를 살펴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지식이 늘어나면 얻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대신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의 관점을 재구성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1989년 Camerer와 동료들의 연구에서는 정보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보를 배제하고 정보가 적은 사람의 판단을 재현하는 데 어려움을 보였고, 2007년 Birch와 Bloom의 연구에서도 성인의 현재 지식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추론하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음이 나타났습니다. 후속 연구에서는 정보가 쉽게 떠오르는 느낌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도 쉬운 정보라고 잘못 해석할 가능성까지 제시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니 아이에게 공부를 설명하다 답답했던 순간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목적지가 보였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목적지도, 갈림길의 의미도 아직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저는 “왜 이 길을 못 찾지?”라고 묻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 좋은 설명이란 내가 가진 지식을 최대한 많이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상대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거리를 발견하고 그 사이에 빠진 다리를 하나씩 놓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다음에 아이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다 “이걸 왜 이해하지 못하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저는 질문의 방향부터 바꿔보려고 합니다.
“아이에게 무엇이 부족한가?”가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은 자신이 아는 것을 줄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게 당연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주어지지 않은 정보일 수 있음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결국 많이 아는 것보다 때로 더 어려운 능력은 내가 알기 전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