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번 느낀 것이 있습니다. 아이가 고민을 이야기할 때는 생각보다 답이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속상해하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면 저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황을 하나씩 정리해 줍니다.
“지금 속상한 것과 실제로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오늘 있었던 일 하나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할 때의 저는 꽤 침착합니다.
그런데 정작 제 일이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직장에서 나눈 대화 중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으면 집에 돌아온 뒤에도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지나갔던 상대방의 말투나 표정까지 다시 떠올립니다.
‘내가 그때 다른 말을 했어야 했나?’
‘그 사람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을까?’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미 끝난 대화를 머릿속에서 다시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에게는 한 가지 일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저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를 붙잡고 여러 가지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왜 남의 문제를 볼 때와 자신의 문제를 볼 때 이렇게 달라지는 것일까요?
이 궁금증 때문에 관련 심리학 자료를 찾아보다 알게 된 개념이 자기 거리두기(Self-Distancing)였습니다.
자기 거리두기는 힘든 일을 무조건 잊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심리적으로 한 걸음 떨어져 마치 관찰자가 된 것처럼 사건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에 가깝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아이의 고민을 비교적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와 제 문제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꽤 흥미로운 단서가 되는 개념이었습니다.

1. 아이의 고민에는 보이던 것이 왜 제 고민에서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자기 거리두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반대되는 개념인 자기 몰입(Self-Immersion)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몰입 상태에서는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당시의 시점에서 다시 경험하듯 생각합니다.
저 역시 직장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잘못 이야기했나?’
‘혹시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처음에는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정보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반복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아이가 비슷한 고민을 이야기하면 저는 사건 밖에 서 있습니다.
아이의 감정뿐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고, 오늘의 일이 며칠 후에는 달라질 가능성도 생각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가 생겨 있는 것입니다.
자기 거리두기를 연구한 외즐렘 아이덕(Özlem Ayduk)과 이선 크로스(Ethan Kross)의 연구를 살펴보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재진술(Recounting)과 재해석(Reconstruing)의 차이였습니다.
재진술은 과거의 일을 다시 재생하는 데 가깝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고, 그래서 기분이 나빴고….’
반면 재해석은 질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왜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을까?’
‘내가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은 없을까?’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아이덕과 크로스의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경험을 자연스럽게 거리 두고 바라보는 경향과 낮은 정서적 반응 사이의 관계가 관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건을 단순히 되풀이하기보다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게 나타났습니다.
이 내용을 접하고 나니 제게도 질문 하나가 생겼습니다.
나는 그동안 고민을 해결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고민을 반복해서 재생하고 있었던 것일까?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오래 생각한다고 반드시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원래 어떤 일이 마음에 걸리면 충분히 생각해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를 오래 생각하면 원인을 발견하고 다음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거리두기를 알아보면서 생각의 시간과 생각의 깊이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같은 질문만 반복하는 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반추(Rumination)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한테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질문이 새로운 이해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아무런 새로운 정보 없이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거리두기가 감정을 무시하는 방법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힘든 일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것이 결국 감정을 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관련 연구를 찾아보면서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 회피가 불편한 경험 자체를 외면하려는 것이라면 자기 거리두기는 그 경험을 바라보되 관찰 위치를 바꾸는 것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자기 거리두기 실험 연구들을 종합한 2023년 메타분석에서도 자기 거리두기가 자기 몰입보다 전반적으로 더 적응적인 결과와 관련됐지만, 효과가 아주 큰 것은 아니었으며 연구의 질과 편향 가능성에 따른 불확실성도 지적되었습니다.
이 부분도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기 거리두기가 ‘이렇게만 생각하면 고민이 해결된다’는 식의 만능 공식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기 거리두기를 감정을 없애는 기술보다는 감정과 판단을 잠시 분리해서 바라볼 기회를 만드는 방법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3. 아이에게 하던 질문을 이제는 저에게도 해보려고 합니다
자기 거리두기를 알아본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새로운 심리기법을 배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아이에게 이미 해주고 있던 말을 왜 제 자신에게는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질문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친한 사람이 같은 일을 겪었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입니다.
아이에게는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제 문제에는 가장 나쁜 가능성부터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 일을 잠시 친한 사람의 일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주일 뒤에도 지금과 똑같이 생각할까?입니다.
오늘의 감정으로 사건 전체를 판단하는 대신 미래의 제 입장에서 현재를 한번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건의 중요성을 억지로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이 판단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세 번째는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입니다.
확인된 사실은 무엇이고, 내가 붙인 해석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누군가 평소와 다르게 짧게 대답했다면 ‘짧게 대답했다’까지는 관찰된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화가 났다’는 것은 제가 붙인 해석일 수 있습니다.
아이의 고민을 들을 때는 이런 차이가 잘 보입니다. 그런데 제 일이 되면 사실과 해석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관련 연구 중에는 3인칭 자기대화(Third-Person Self-Talk)라는 흥미로운 방법도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라고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사용해 ‘○○는 왜 이 일이 계속 신경 쓰일까?’처럼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2017년 관련 연구에서는 이러한 3인칭 자기대화와 정서 조절의 관계를 뇌파와 fMRI를 이용해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혼자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방법 자체보다 그 안에 있는 원리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늘 세상을 바라보던 ‘나’를 잠시 바라보는 대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아이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것도 아이의 문제를 제3자의 위치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끔은 저 자신에게도 그런 관찰자의 자리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 거리두기를 알아보기 전에는 고민이 생겼을 때 충분히 오래 생각하면 결국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얼마나 오래 생각했는가보다 어느 위치에서 생각했는가가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이의 고민을 들을 때의 저와 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의 저는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여러 가능성이 보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의 생각만 반복됩니다.
그 차이가 단순히 제가 아이보다 현명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이의 문제에서는 제가 사건 밖에 있었고, 제 문제에서는 사건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겼을 때 무조건 “생각하지 말자”고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질문을 바꿔보려고 합니다.
친한 사람이 같은 일을 겪었다면 나는 뭐라고 말해줄까?
일주일 뒤의 나는 이 일을 어떻게 볼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내가 추측하고 있는 것은 각각 무엇일까?
아이에게는 쉽게 해주던 질문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저에게도 필요했던 질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거리두기는 고민을 없애는 방법도 아니고 문제를 가볍게 여기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옮기는 방법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문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 무조건 더 깊이 파고들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나는 이 문제를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어떤 고민에는 답을 찾기 전에 의자부터 한 칸 뒤로 옮겨보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자료
Ayduk, Ö., & Kross, E. (2010). From a distance: Implications of spontaneous self-distancing for adaptive self-reflec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8(5), 809–829.
Moser, J. S., et al. (2017). Third-person self-talk facilitates emotion regulation without engaging cognitive control: Converging evidence from ERP and fMRI. Scientific Reports, 7, 4519.
Murdoch, E. M., Chapman, M. T., Crane, M., & Gucciardi, D. F. (2023). The effectiveness of self-distanced versus self-immersed reflections among adults: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of experimental studies. Stress and Health, 39(2), 255–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