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가 되고 가정의 지출을 챙기다 보니 한 달 동안 돈이 어떻게 빠져나가는지 예전보다 신경 쓰게 됩니다.
생활비부터 각종 고정비까지 카드로 결제하다 보면 특별히 큰 물건을 산 기억은 없는데도 유난히 지출이 많았다고 느껴지는 달이 있습니다. 하나하나는 필요한 지출이었는데 합쳐놓으면 꽤 큰 금액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달에는 카드 명세서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보고도 바로 열어보기가 싫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상한 행동입니다.
이미 카드를 사용했으니 제가 명세서를 확인하든 하지 않든 결제 금액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빨리 확인해야 불필요한 지출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다음 달 소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조금 있다가 확인하지 뭐.
그러면서도 명세서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확한 금액을 보기 전까지는 적은 가능성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적게 나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명세서를 여는 순간 그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예상보다 적으면 안심하겠지만 많다면 정확한 숫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많이 썼는지 확인하고 다음 달에는 어떤 지출을 줄일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피하고 있었던 것은 카드 명세서일까요, 아니면 명세서를 확인한 다음 해야 할 일들이었을까요?
관련 심리학 자료를 찾아보다 정보 회피(Information Avoidance)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 정보 회피는 단순히 정보가 없어서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릅니다. Sweeny와 동료들은 이용 가능하지만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정보를 얻는 것을 막거나 늦추는 행동으로 정보 회피를 정의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정보를 일부러 피하는 것일까요?
정보 회피를 알아볼수록 카드 명세서를 미뤘던 행동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심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1. 우리가 피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숫자가 만드는 감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정보가 많을수록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드 사용 내역을 알아야 소비를 조절할 수 있고, 검사 결과를 알아야 필요한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업무에서도 정확한 결과를 알아야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보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를 가집니다.
그런데 정보 회피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인간에게 정보의 가치가 이것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Golman, Hagmann, Loewenstein은 경제학·심리학 등의 정보 회피 연구를 종합하면서 유용하고 무료인 정보조차 사람들이 피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정보 자체가 사람의 심리적 효용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드 명세서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명세서에 적힌 숫자는 단순한 정보입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금액이 적으면 안도감을 주고, 예상보다 많으면 후회나 걱정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즉, 같은 정보가 실용적인 가치와 정서적인 비용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있다가 확인하자’는 제 행동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명세서를 열지 않는다고 카드값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명세서를 열기 전까지는 정확한 숫자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을 잠시 미룰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념 기반 효용(Belief-Based Utility)이라는 관점도 연결됩니다. Golman 등의 논의에서는 사람이 객관적인 결과뿐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에서도 효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한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를 피할 유인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카드값을 확인하기 전의 저는 실제 카드값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정보 회피는 현실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현실에 대한 나의 믿음이 바뀌는 시점을 늦출 수는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면서도 때로는 확실한 나쁜 정보보다 조금의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상태를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정보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은 알고 난 뒤 생기는 행동 의무입니다
정보 회피를 조사하면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개념은 행동 의무(Behavioral Obligation)였습니다.
Howell과 Shepperd는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면 정보를 더 회피하는지를 실험했습니다.
연구 결과, 정보를 얻은 뒤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그 정보를 피하려는 경향을 더 보였습니다.
이 개념을 알고 나니 카드 명세서를 미루는 행동이 더 명확하게 이해됐습니다.
카드값을 확인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예상보다 지출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이번 달은 어쩔 수 없었지’라고 생각하고 끝내기 어려워집니다.
사용 내역을 살펴봐야 하고, 불필요한 소비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야 하며, 다음 달에는 소비 습관을 바꿔야겠다는 부담도 생깁니다.
모를 때는 아직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되지만 알고 나면 행동해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경험은 카드 명세서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읽으면 답장을 해야 할 것 같은 메시지를 미루는 것도 비슷합니다. 어떤 결과를 확인하면 다음 결정을 내려야 하고,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냥 확인하면 되잖아”라는 말이 실제 심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화면을 열어보는 몇 초가 아니라 화면을 열어본 뒤 시작될 일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정보 회피를 단순한 게으름이나 용기 부족으로만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피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정보 자체가 두려운 것인지, 정보가 만들 감정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그 정보를 알게 된 뒤 해야 할 행동이 부담스러운 것인지에 따라 해결 방법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모든 정보는 바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반대되는 질문도 생겼습니다.
정보를 피하는 것이 문제라면 모든 정보는 최대한 빨리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 역시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정보가 부족한 시대라기보다 지나치게 많은 시대에 가깝습니다.
뉴스, SNS, 이메일, 메시지, 금융 알림 등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들어옵니다.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확인하는 것이 반드시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저는 정보 회피와 의도적인 정보 선택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행동은 겉으로는 똑같이 ‘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유가 다릅니다.
필요하지 않은 알림을 꺼두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것은 주의력과 시간을 관리하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반면 카드 지출이 많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 불편한 숫자를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명세서를 미룬다면 상황이 다릅니다.
제가 구분하기 위해 생각해 본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이 정보를 알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지금 확인하지 않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정보를 미룸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가, 아니면 문제를 뒤로 옮기고 있을 뿐인가?
이 세 질문을 카드 명세서에 적용하면 답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지출액을 알면 소비를 조절할 수 있고, 확인하지 않는다고 이미 사용한 돈이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불편하더라도 정보를 확인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한 가지 방법은 바꿔볼 수 있습니다.
정보를 확인하는 것과 문제 전체를 해결하는 것을 한 번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명세서를 확인하는 순간 이번 달 소비 습관을 모두 분석하고 다음 달 예산까지 완벽하게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보 하나의 심리적 무게가 너무 커집니다.
대신 오늘은 금액만 확인하고, 내일 지출 항목을 살펴보는 식으로 행동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미루지 말자’는 다짐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정보 회피를 줄이려면 정보를 보는 용기뿐 아니라 정보를 본 뒤 해야 할 행동의 크기를 줄이는 것도 중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정보를 피하려는 경향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Howell과 Shepperd는 4개 연구의 7개 표본, 총 4,393명을 대상으로 연구해 정보 회피 경향을 측정하는 8개 문항의 척도를 개발했습니다. 이 연구는 사람들이 정보에 얼마나 열려 있는지에 개인차가 있고, 정보의 종류에 따라서도 회피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정보 회피를 무조건 의지 부족으로 설명하기보다 어떤 정보가 어떤 사람에게 왜 위협적으로 느껴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정보 회피를 알아보기 전에는 카드 명세서를 바로 확인하지 않는 제 행동을 그저 보기 싫은 것을 미루는 습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내야 할 카드값인데 빨리 확인하면 되는 일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보 회피 연구를 살펴본 뒤에는 그 행동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정보는 단순히 무언가를 알려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기대가 사라질 수도 있고,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도 있으며, 때로는 행동해야 할 책임까지 따라옵니다.
카드 명세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피하고 싶었던 것은 숫자 몇 개가 적힌 화면보다 그 숫자를 확인한 뒤 ‘다음 달에는 줄여야겠다’고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카드 명세서를 보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왜 확인하기 싫은지를 이해하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조금 분명해졌습니다.
다음에 또 명세서를 열어보기 싫다는 생각이 든다면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숫자를 피하고 있는 걸까, 숫자를 본 뒤 해야 할 일을 피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문제가 그다음 행동이라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일단 사실부터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정보 회피를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인간이 언제나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만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때로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알게 되는 순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를 피하기도 합니다.
아마 그래서 카드 명세서는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명세서를 닫아두는 동안 숫자는 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제가 그 숫자의 존재까지 모르게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참고자료
Sweeny, K., Melnyk, D., Miller, W., & Shepperd, J. A. (2010). Information Avoidance: Who, What, When, and Why. Review of General Psychology, 14(4), 340–353. 이용 가능하지만 원하지 않을 수 있는 정보를 막거나 지연하는 행동으로 정보 회피를 정의하고 관련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논문입니다. (Sage Journals)
Howell, J. L., & Shepperd, J. A. (2013). Behavioral Obligation and Information Avoidance. Annals of Behavioral Medicine, 45(2), 258–263. 정보를 얻은 뒤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정보 회피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다룬 연구입니다. (PubMed)
Howell, J. L., & Shepperd, J. A. (2016). Establishing an Information Avoidance Scale. Psychological Assessment, 28(12), 1695–1708. 4개 연구, 7개 표본, 총 4,393명을 바탕으로 정보 회피 경향을 측정하는 8문항 척도를 개발하고 검증했습니다. (PubMed)
Golman, R., Hagmann, D., & Loewenstein, G. (2017). Information Avoidance.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55(1), 96–135. 경제학과 심리학 등의 연구를 종합해 유용하고 무료인 정보조차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이유와 정보 회피의 결과를 폭넓게 검토했습니다. (American Economic Association)